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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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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 1,2,3』 1 달리 해답이 없었다. 지극히 복잡하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에 대해 삶이 부여하는 그런 일반적인 대답만 있을 뿐이었다. 그 대답이란, 그날그날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것, 즉 잊어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잠으로 잊을 수는 없다. 2 "어쩝니까? 그런 어리석은 구시대적 방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데요." 브론스키가 말했다. "그런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요. 내가 알기로 오직 이성에 따른 결혼만이 행복할 수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 대신 이성에 따른 결혼의 행복도 종종 먼지처럼 흩어지곤 하잖습니까? 인정받지 못한 그 열정의 출현 탓에 말입니다." 브론스키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방종한 시기를 보낸 이후를 이성에 따른 결혼이라고 부르죠. 그것은 한 번은 반드..
정유정 『완전한 행복』 1 바이칼 호수로 출발한 건 이틑날 아침이었다. 호텔 직원에 따르면 아주 가깝다고 했다. 그는 몰랐다. 러시아의 '가깝다'와 한국의 '가깝다' 사이엔 우주 하나가 존재한다는 걸. ※ 인도사람들 생각이 나서 훗~하고 웃음이 나왔다. 2 어느 유명 헬스 유튜버가 주장한 '미인론'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미인이 있다고 했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지하는 범용 미인. 꽂힌 자에게만 추앙받는 전용 미인. ※ 이런 전용 미인들에게 옛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지. 도화살이 끼었다고~ 객관적으로 보면 보편적 미인도 아닌데 이상하게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인들을 종종 봤다, 나도 ㅋ 3 로버트 프로스트는 옳았다. 어머니가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데 20년이 필요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덴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1 인간 아르망 푸조는 정확히 어떻게 회사 푸조를 창조했을까? 그 방식은 역사를 통틀어 사제와 마술사가 신과 악마를 창조해 낸 방식과 매우 비슷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일요일마다 교구 성당에서 여전히 성체를 창조해내는 것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활동들이다. 프랑스 신부의 경우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신성한 복장을 한 가톨릭 신부가 적절한 순간에 엄숙하게 말을 하면, 평범한 빵과 포도주가 신의 살과 피로 바뀐다. 신부가 라틴어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내 몸이다)"이라고 야릇한 주문을 외우면, 빵은 그리스도의 살로 전환된..
김금희 『경애의 마음』 1 경애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 꽤 잘 알았다. 그러니까 현실의 효용 가치로 본다면 애저녁에 버렸어야 했을 물건들을 단지 마음의 부피를 채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말이다. 2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아리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진다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끝을 말하려면 지금 발밑에서 너풀거리며 나뒹구는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같이 눈앞에 지나가는 어떤 것도 아픔을 환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풍경도 산주를 떠올리게 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고...
은희경 『빛의 과거』 1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그녀는 그 문장을 쓴 영국 작가의 책에서 한 줄을 더 인용했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최근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전의 유성으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 2 우리 둘 중 누군가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
노정석『삼파장 형광등 아래서』 1 이모랑 저녁에 얘기를 많이 했다. 철든다는 게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같은 맥락에서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둘 다, 자기 삶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은 듯했다. 2 저녁에 길게 통화했다. 못하는 게 뭐냐고 물어서 자신 있게 수학이라고 답했다. 못하는 걸 공부 이외에 생각해낸다는 건 어렵다. 어느 정도가 못하는 건지 모호하니까. L도 그런 건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거꾸로, 공부가 우리에게 무언가 못한다는 인식을 주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무언가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평균과 등급이 생기면서 무엇이 '부족'한지 알리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되어버렸다. 모순적이다.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을 텐데, 그..
델리아 오언스『가재가 노래하는 곳』 1 그때 까마귀들이 울었다. 비밀을 지키는 걸로 말하자면 까마귀가 진흙보다 못하다. 숲속에 신기한 게 보이면 무조건 모두에게 떠벌려야 직성이 풀렸다. 까마귀의 경고를 귀담아들으면 보상이 따른다. 2 마침내 메이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작은 피아노가 부두로 들어오듯 판자가 흔들거렸다. (메이블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이 문장 하나가 그녀의 모습 전체를 말해준다. 작가님 대단~) 3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 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 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 낙엽은 빛을 반사하며 돌풍을 타고 소용돌이치고 미끄러지고 파닥거렸다. (과연..
김영하『빛의 제국』 1 "매력이 문제야. 위성곤씨한테 매력이 철철 넘쳤다면 포르노를 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매력만 있다면 사람들은 뭐든 용서하려고 들지. 좀 부도덕해도, 말을 뒤집어도, 사악한 짓을 해도, 다 이해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나 이런 후진 회사에 다니는 대머리 아저씨가 포르노를 보는 건 용서할 수 없는 거야." 2 국어처럼 교육의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설득시키기 어려운 과목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너무도 유창하게 잘하는 한국말을 왜 더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3 기영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