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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델리아 오언스『가재가 노래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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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까마귀들이 울었다.

비밀을 지키는 걸로 말하자면 까마귀가 진흙보다 못하다.

숲속에 신기한 게 보이면 무조건 모두에게 떠벌려야 직성이 풀렸다.

까마귀의 경고를 귀담아들으면 보상이 따른다.

 

 

2

 

마침내 메이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작은 피아노가 부두로 들어오듯 판자가 흔들거렸다.

(메이블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이 문장 하나가 그녀의 모습 전체를 말해준다. 작가님 대단~)

 

 

3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 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 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

낙엽은 빛을 반사하며 돌풍을 타고 소용돌이치고 미끄러지고 파닥거렸다.

(과연 이 작가는 과학자인가 예술가인가.....어떻게 이렇게 지극히도 평범한 자연 현상을 보고 이런 문장들을 생각해 낼 수 있지.)

 

 

4

 

아직 수줍어 겨울에 순종하는 해가 이제 고약한 바람과 못된 비가 쏟아지는 나날들 사이로 빼꼼 얼굴을 디밀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거짓말처럼 봄이 팔꿈치로 쑥 밀치고 들어와서는 아예 눌러앉았다.

낮이 따스해지고 하늘이 윤을 낸 듯 반들거렸다.

 

 

5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6

 

안전하게 몸을 사리고, 갈매기 먹이를 주고.

삶을 살아가며 보관할 수 있는 크기로 감정을 잘게 자라는 데는 도가 텄다.

 

 

7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해서 웃어주었다.

살면서 해본 적 없는 일인데도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했다.

 

 

8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 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9

 

"이제 원하는 게 뭐야, 테이트?"

"어떤 식으로든, 네가, 나를 용서해주는 거." 테이트는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기다렸다.

카야는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왜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용서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걸까?

카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10

 

조디의 눈은 예전과 똑같았다.

사람의 얼굴은 풍상을 겪으며 달라지지만 눈은 본성의 창으로 남아 있나보다.

 

 

11

 

카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를 속삭여 읊었다.

 

심장을 싹싹 쓸고

사랑을 잘 치워두네

다시는 쓰고 싶어질 일이 없으리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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