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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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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로가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옛 애인이결혼식을 올리고 베스트 프렌드가 결혼을 발표한 날이라면 하물며 그렇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을 ‘ㄱ’에서부터 차례로 훑어보았다.
목록은, 참혹했다.


2

문자 메시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 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 때 더없이 유용하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인간간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까마득했다.


3

나는 말끝을 흐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약 일곱 달 전이다.

민망하게도 그날 그가 입었던 셔츠 색깔까지 기억났다.

하긴 누굴 원망하랴.

쓸데없는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무튼 백해무익한 일이다.



4

세상 모든 엄마이 목소리엔,
그 자식들에게 기기묘묘하고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주파수라도 흐르는 걸까.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뾰족한 창끝마냥 곤두섰던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풀어졌다.


5

어처구니없게도,
왜,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른도 때론 흐느껴 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눈물 없이도 메미른 가슴으로 통곡한다.
이것이 이 도시의 비밀스런 규칙이다.


6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켜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7

통화연결음으로 어떤 음악을 깔아두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이 대번이 드러난다.
최신가요만을 골라 이틀이 멀다 하고 바꾸는 사람에게서는 첨단유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고,
처연한 클래식 연주곡만을 고수하는 사람에게서는 일말의 허영이 묻어난다.
컬러링 설정을 하지 않고 따르릉 소리를 그냥 놔둔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심하거나 아니면 소심한 사람일 것이다.


8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만은 다를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싶어 보인다.

그렇다고, 결혼 제도 밖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아니라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 그 학급 구성원들의 암묵적 규칙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혼자 점심시간까지 기다려 독야청청 숟가락질을 하더라도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재인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조바심치며 도시락 뚜껑을 연 것뿐이다. 반찬 통에 담겨져 있던 개구리가 툭 튀어 나와 어느 쪽으로 도망가버릴지, 뚜껑을 열기 전에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9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짓고 싶어 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10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대로 침대 머리맡에 메모를 남겼다. 태오는 짭, 입을 다시며 돌아누웠다. 혹시 아침상이라도 봐두고 나가야 하는 건가? 새하얀 레이스 보로 덮은 정갈한 아침 밥상. 레이스 보는 커녕 밥상을 덮을 신문지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공연히 미안했다. 이것이 이 나라 여성들의 핏속에 유구하게 흐르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일까. 정작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누렇게 뜨느 얼굴에 처덕처덕 분을 바르고 있지만 말이다.


11

공인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순간 관계를 남루하고 보잘것없게 만든다.
이제야 알겠다.
동거의 음습하고 우울한 기운은 바로
그 비자발적 익명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세상의 적의와 맞부딪치기 위해 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문가로 나아갔다.


12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 사이는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 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13

종일 빈둥대다가 어스름 해질 무렵 목욕재계를 하고 남자랑 놀러 나가는 여자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예전의 나였다면 곧바로 혀를 차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오호, 팔자 좋은데. 진정 부러운 삶이로군!” 이라는 코멘트를 날려주었을 것이다. 그 속에 다량의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진짜로 성실한 여자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서 입도 못 다물겠지만, 나는 내심 스스로를 꽤 성실한 부류의 여성이라고 규정해왔었다. 그 말 속에는, 남자에 매달리지 않는 여자, 경제적 부분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자립적인 여자 등등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성실한 여자’의 반대편에는 ‘한심한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거기엔, 남자밖에 모르는 여자, 경제적 부분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의존적인 여자 등등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한마디로, 너무 교만했던 거다. 이제 나는 그토록 경원해 마지않던 ‘한심한 여자’가 된 것인가.


14

-그럼 결혼을 위한 결정적 타이밍은 언제일까?
-여러 가지 연때가 맞을 때겠지. 마침 결혼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에 결혼할 만한 조건의 남자가 나타난다든지. 딴 애들 결혼하는 거 보면, 꼭 가장 사랑했던 남자랑 결혼하는 건 아니더라. 연때가 맞는 남자랑 하지.

혹시 모든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기분이 드는 지금 이순간이야말고, 역설적으로 나의 운명적 연때인 것은 아닐까. 나는 희망을 담아 빠르게 타이핑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 떨어지는 남자와 평화롭고 무난하게 사는 결혼생활도 괜찮지 않아?
-오은수. 너 설마 결혼이라는 제도에 아직도 판타지를 품고 있는 거야? ㅋ ㅋ

문장 뒤에 붙은 ‘ㅋ ㅋ ’가 나를 비웃고 있음을 안다. 하는 수 없다. 나한테는 제도를 거스를 만한 용기가 없는걸. 용기를 쥐어짤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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