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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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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란 건 참 이상하다. 한번 역할이 맺어지면 대체로 그 역할이 고정되어 진행된다.

한번 내가 누군가의 고민을 듣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면 대체로 그를 만나 나는 그의 고민을 들어주는 자가 되고,

내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면 대체로 나는 고민을 털어놓아야 할 때 그를 찾아가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가 공격자가 될 수도 있고 상처 입는 자가 될 수도 있으나

우리 셋의 경우 미카엘과 안젤로가 그런 형국이었고 그 사이에 내가 끼어 있었다.

늘은 아니지만 가끔씩 미카엘은 화를 냈고 안젤로는 상처 입었다.

나는 화를 내는 미카엘이 상처 입는 안젤로를 힘겨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절대 참아내며 견디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 카시아누스였던가?

그러니 약한 것은 언제나 안젤로가 아니라 미카엘이었을 것이다.

 

 

2

 

가끔 생은 우리를 배반하는데 그건 주로 가슴이 나설 때의 일이다.

몇 백만 년 동안 그런 가슴이 골치 아팠던 머리는 그 사실을 쇼윈도에 전시하기를 꺼려 지하 창고에 처박아두려 했지만

가련한 그 시도가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가끔 승리했다 해도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역습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3

 

그럴 때 내 가슴 한쪽이 누군가 찬 소주를 붓는 것처럼 서늘해져왔다.

그러나 나는 감히 바랄 수 없었고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대신 가끔씩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들이 가슴 한구석을 얇고 생생하게 저미면서 지나갔다.

 

 

4

 

"......9년 동안 여러 번 도망치려고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 너 그런 거 아니? 변명거리가 너무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아. 가진 것도 많아. 심지어 불성실하게 약혼을 이어가고 있는 나에 대한 인내심까지."

 

 

5

 

인간들은 낯선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 겨우 언어를 발명해내었으나 그 언어의 벽에 갇혀 실상 진실을 모두 놓치고 만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언어의 집인 몸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 없는 진실되지 않은 내 언어가 우리 사이로 들어서 쩡! 하고 우리를 갈라놓는 그 순간 나는

미카엘도 동시에 나와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에 당혹감과 함께 슬픔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 모든 사태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결정할 수 없었으나 우리의 이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6

 

나는 내가 요즘 그 둘과 멀리 떨어져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소희와의 관계에 대해 신경을 쓰는 동안 두 사람이 무슨 삶을 살고 있었는지 이만큼 무심해져버렸던 것이다.

한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숨기는 것도 없었고 모르는 것도 없었는데.

우리는 정말 형제 같았는데 말이다.

 

 

7

 

이상하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으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 선명해지는 것.

아마 대표적인 이가 예수였겠지.

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닐까.

 

 

8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재채기와 미친 것과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9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호함이다.

모호함 중에서도 진한 불행의 기미를 가진 모호함이다.

기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것도 그 사건의 여파에 대한 불신, 모호함 때문이며,

그보다 더, 가족의 죽음보다 더 실종이 고통스러운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건은 차악의 희망인 체념조차 불가능하게 하니까.

 

 

10

 

나는 그때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형벌인 줄 알게 되었다.

 

 

11

 

"요한 수사님, 오늘은 창밖으로 바람이 많이 불더라구요. 바람은 잡을 수 없어요. 한 방향으로만 불어 가니까요. 그리고 가버리니까요.

강물도 그렇죠. 한번 흘러간 강물은 더 이상 방금 전의 그 강물이 아니죠. 시간도 한 방향으로만 흘러요. 말할 것도 없죠.

이 세상의 모든 흘러 다니는 것 가운데 어떤 한순간 한 지점에서 양방향으로 흐르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에요.

그러나 그것조차 대개는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지요.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더 나을까? 의미가 있을까?

10년이 지나도 잘했다고 느낄까?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합니다."

 

 

12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떤 죽음도 상투적이지 않다.

수십 억의 사람이 태어난다 해도 어떤 태어남도 진부하지 않듯이 말이다.

 

 

13

 

한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도착하고 나면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 어느 날부터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의미 지어지듯이 말이다.

 


 

14

 

어차피 이렇듯 갑작스러운 죽음은 실은 죽음 전에 해야 할 이별의 준비들을

죽음 후에 하게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15

 

사랑은 소낙비처럼 그냥 오는 거란다.

등산 도중 산등성이에서 앉아서 쉴 때 난데없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냥 홀연히 다가오는 거야.

선택하는지 안 하는지가 우리의 몫이라고 하지.

그러나 거부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그냥 바람일지도.

어린 나이였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운명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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