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게 뭔지 알아? 씹으면 첫사랑의 쓰라림을 느낄 수 있다는 라일락꽃이야! 어디 한번 맛볼 테야?"
그러면 정민은
"잘못했어. 내가 이 나무에 매달린 꽃들 다 씹어먹으면 용서해줄 거야?" 라고 말하며
그 동안 자신에게 생긴 일이며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따위를 천천히 내게 들려주곤 했다.
2
혀가 꼬인 채 정민은 방 안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역시 방 안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 등을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여행지라고 꼽더니,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방 안이든 방 밖이든 고산증에 걸리면
그 동안 자길 좋아했던 남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나타나서 말을 거는 환각을 경험할 수 있다는
히말라야라고 했다.
3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주에서 정민과 나란히 누워 바라본 밤하늘처럼 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해 여름 헬무트 베르크에게 들은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몇 번을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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