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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심윤경『이현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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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도 자네랑 대화하는 게 재미없어.
똑똑한 체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못 알아듣거든.
훗날 자네도 내 나이가 되면 이해하게 될거야.
지나온 세월이 자꾸 쌓이게 되면 무언가 갈피가 잡히거든.
무엇이 무엇의 전조였는지,
무엇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네.
하지만 알게 되었을때는 이미 늦는 거지.
그 소중한 지식들은 그저 늙은이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거든.
젊은 사람들이 참고하기엔 너무 낡고
어리석은 이야기들일 뿐이지.
그래서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림이나 똑같이 살아가게 된다네.
자네도 아마 나와 똑같이 살게 될거야.
자네가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자네가 좀 영리해 보이긴 해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거든.
인생을 좀더 오래 살아본 선배로서 충고하자면,
그녀의 행복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자네 몸뚱이나 잘 챙기게.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네."


2

작고 평번한 것이라도 무언가 행복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훼손되지나 않을까 시시각각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대단하고 귀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짧은 여행이나 한 끼의 즐거운 식사처럼
일상적이고 평번한 것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오히려 작고 기본적인 것이라 여겨질수록
그것을 훼손당했을 때 닥쳐올 고통의 부피는 상상하기 어렵도록 커지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들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기원한다.
제가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한줌도 안되는 가족의 안전,
그저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안정,
신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을 만큼의 건강,
오로지 그 정도를 위하여 당신께 기도하옵나니,
청컨데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우리의 소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그들이 소원하는 것이 작고 평범한 것에 불과할수록,
신이라면 이 정도는 지켜주어야 한다는 배짱에 가까운 신념도 강렬해진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배신당하면
마음껏 신을 부정하고 저주하며 패악을 부린다.


3

나의 아내를 포함하여, 세상의 여인들은
그 남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소한 일들로 문제를 삼았고
그것을 빌미 삼아 남편에게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남편이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성의 있는 눈길을 돌려본들
무엇 하나 중요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여건,
호르몬의 균형과 불균형,
그들이 쇼핑한 물건들,
시가와 친정의 각종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사소한 말실수와 감정 다툼들.
주말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는 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한없이 잘고 모호하고 자의적인 기준들.

나는 젊은 날부터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녀의 복잡하고 미묘하고 왔다갔다하는 기분들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하여 누차 이해를 구했다.
아내는 내가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나는 아내에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4

나는 그게 사랑이었노라고
지금도 믿고 싶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했노라고.
하지만 이진이 죽은 뒤에야
새롭게 명료해진 나의 두뇌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노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닮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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