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삶의 중요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비밀 한 가지는
우리 대부분이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여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식을 토대로 하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인간 정신이
생후 3년에 이르기까지 60퍼센트,
여섯 살까지 95퍼센트 형성된다고 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다섯 살까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신분석을 받은 후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얼마나 정확하게 인간 정신을 설명하는 말인가 싶어 놀란 일이 있다.
2
자기애적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내면과 공감하거나 소통하는 데 관심이 없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반응에는 상관없이
그저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사랑을 주도 또 줄 뿐이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채
아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가부장제 남편들에게서도 그런 사례를 자주 본다.
그들은 소외감과 심리적 불편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어느날 '이혼하자'고 하면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하고 화부터 낸다.
꼬박꼬박 월급 봉투 가져다주고,
주말마다 외식도 시켜주고,
철마다 옷도 사주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황인숙 시인의 시집 <자명한 산책>에 실린 첫 번째 시는 <강>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4
"때로 담배 한 대로 위안이 되는 일도 있지요.
담배 한 대로 위안이 되는
서글픔, 중압감, 배고픔, 추위.....
이렇게 아무도 없는 새벽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피울때면
일상의 발길에 걸리는 자잘한 돌멩이들이
모두 담배 연기와 함께 휘발되는 것을 느낀답니다.
남편의 늦은 귀가나 저의 불면 같은 것까지도요."
<담배 피우는 여자>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
....
......
나는 흡연 여성들의 생존법을 많이 알고 있다.
남성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결혼 상대에게는 더욱 그러하며,
결혼 후에는 남편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녀들은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양치와 샤워를 꼼꼼히 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담배를 간수하는 법도 잘 알고 있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그러하듯이.
5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은
대체로 투사일 경우가 많다.
타인의 이기적인 면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타적인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도 억압당한 이기심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타인의 성적 방종에 대해 유독 분노하는 사람은
성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겠지만
그의 내면에도 바람둥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경솔한 사람을 경멸하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도,
거짓말하는 사람을 경원시하는 정직한 사람도,
저마다의 내면에는 바로 그들이 인정하지 못한채
타인에게 전가하는
바로 그 부정적인 측면이 억압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비난할 때
그 행위는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되는 셈이다.
6
"남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만 줄여도
생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게슈탈트-
7
그런 생각은 곧 여행 자체가 어쩌면
총체적인 방어행위가 아닌가 하는데로 이어졌다.
오래 전부터 나는 늘 낯선 곳으로 멀리 떠나기를 꿈꾸어왔다.
대학 진학 때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겠다면서
예비고사 지망지에 '제주도'라고 써넣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틈만 나면 혼자 여행을 다녔다.
주말, 연휴, 휴가 때마다 지방의 낯선 고장을 둘러보곤 했다.
만약 직장에 매여 있지 않았다면
이십대를 방랑으로 점철했을지도 몰랐다.
오너드라이버가 된 가장 큰 이유도
더 편리하게 떠돌기 위해성ㅆ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부담도 덜고,
대중교통 시설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마음대로 가고,
한밤이든 새벽이든 마임이 일 때 불쑥 떠나고 싶어서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현실의 삶에 안착하지 못한 채
늘 다른 삶을 꿈꾸었다.
8
타인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사기치는 사람.
심리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사람은 후자이다.
그런 이들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받고 싶은 보호와 관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푼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그 일을 한다.
인간에게는 호의를 베풀어놓고
상대가 그것에 대해 보답하는지를 지켜보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이 한 일에 대해 왼손이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베푼 친절에도
틀림없이 그런 속성이 있었을 것이다.
9
늘 세상살이에 미숙하고 위태롭다고 느꼈던
미진함의 본질도 그것이었다.
순수하고 사심없이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세상과 인간에 대해
더 냉철하고 음험한 수준까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과 인간의 속성에 대해 알지 못한채
순수하게 산다는 것으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은 타인으로 하여금
사기치고 싶은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10
질투는 나의 힘
분노는 나의 에너지
콤플렉스는 나의 추진력
11
이제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그런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로서
존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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