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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2024년

박범신『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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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내 온라인서점 보관함에 담겨 있었고, 이번에 구입했다.

단편소설이나 산문보다는 주로 장편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박범신이니까~

그리고 히말라야니까....

 

왜 내가 그토록 히말라야에 끌리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히말라야가 배경이 되는 책은 알게 되면 보통 읽는다.

히말라야를 향해가는 여행기도,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심지어 다큐멘터리도....

 

이 책은 히말라야 자락 중에서도 에베레스트를 보러 가는 비교적 험한 트레킹코스와

일전에 정유정 작가의 산문에서 알게 된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코스....

그리고 티베트의 카일라스를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씌여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부분에 대해 읽을 때는 문득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은퇴하고 나면 제일 먼저 산티아고 순례길 가자!!"

"갑자기? 그래~" 하고 답이 왔는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다가 묻는다.

그럴 정도로 신앙심이 깊지는 않지 않나? 하고 ㅋㅋㅋ

물론 그렇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고자 하는 것은.....신을 찾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나 자신의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고~ 후훗~

 

내가 믿고 읽는 몇몇 작가의 글들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라면 생각지도 못할 멋진 문장들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다.

박범신 작가의 글도 늘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폐암일기가 수록되어 있어서 병을 앓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를!!

 


 

1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입니다.
저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걸 알아서 '사회'라는 집을 만든 것일진대,
불완전한 그들이 만든 사회가 그들의 의지처가 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의지처로서의 역할을 다 잃은 듯합니다.
경쟁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분열은 자학적 수준에 도달했으며,
생명 가치는 효율성에 따라 일사분란한 서열화를 이루었습니다.
실패하면 죽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

마을은 마을로 이어지고, 카페는 카페로 이어지고, 카푸치노는 카푸치노로 이어진다.
돌아보면 지난 열흘간, 걸으며 내가 줄곧 그리워했던건 길가 카페에서 마시던 카푸치노 한잔,
어쩌면 다음, 또 다음 카페에서 마실 카푸치노 한잔이 그리워서,
에오라지 그 힘에 의지해 마을과 마을 사이의 먼 길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겨우 카푸치노에서 카푸치노에의 욕망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라뇽 마을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델 카미노에서도 카푸치노를 마신다.
카페는 지친 나에게 예배당 같은 느낌이다.
개울을 건넌다.
순례자들과 함께 흐르는 스페인의 개울은 어디든 거울 속처럼 맑다.

 

3

산에서만이 아니라 인생길에서도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다.
때로는 배우자도 서로 간에 배낭이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짜 배낭처럼 느껴지는 건 자식들이다.
나는 자식이 셋이니, 인생길에서 배낭 세 개를 짊어지고 걸어온 셈이다.
짐이라는 뜻은 아니다.
배낭은 무겁기도 하겠지만 아주 소중한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
자식이라는 이름의 배낭을 두고 단지 무거운 짐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
......
자식이 셋이면 인생길에서 배낭을 세 개 짊어지고 가는 셈이란 비유를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인생길에선 동키도 없다.
솔직히 말해 자식이라는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많은 순간 그 배낭이 때로 얼마나 온 몸을 짓누르는가.
내팽개치고 싶은 순간도 없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보라, 자식의 웃음소리 한 번에 온몸의 피로가 가시고 자식의 눈빛 하나에 없었던 힘이 막 솟는 것도 사실이다.
혹시 모진 마음이 들다가도 자식을 생각하면 얼른 제 마음자리로 되돌아오니
자식이라는 이름의 배낭은 인생길에서 하나의 방부제 역할로도 손색이 없다.

그렇다.
자식이라는 배낭 때문에 허리가 휘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낭이야말로 인생길에서 시종 나를 뜨겁게 걷도록 도울 뿐 아니라,
하느님의 참다운 축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4

아내를 보지 않고 하는 말이니 내 말은 우렁찬 방백과 다름없다.
"확률상으론 불리한 게임이잖아.
생존율이 겨우 27퍼센트라는데, 병원에서 하라고 한다고 무조건, 가슴을 찢어 열어 재껴야 할까.
수술하지 말까봐.
의사들이 칼로 가슴을 찢을 때 무슨 생각을 할 거 같아?
나를 뭐 사람 취급할 것 같아?
옆구리 터진 인형, 고쳐봤자 도긴개긴일지도 모르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니,
다른 헝겊 좀 대고 쑹덩쑹덩 꿰매는, 그런 형국일거라고 봐.
그 짓보다, 차라리 공기 좋은 곳 가서 산책하고 책도 읽고....
그러면서 몇 년 버티면, 평균수명 얼추 되니깐, 그리 사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인간적으로다가, 품위 있게 말이야.
품위 있게 죽음을 맞아들여야지.
내가 뭐 그래도 작가잖아. 청년작가잖아!"

 

5

그렇다. 이제 나는,
나 몰래 암종을 품은 불충으로 내게서 분리돼 폐기물이 되고 만 나의 왼쪽 폐 상엽을 용서하고자 한다.
날로 침침해지는 눈, 무례하게 빠져나온 어금니, 깊어지는 주름살, 늘어나는 백발도 다 용서해야겠다.
걸핏하면 뒤틀리는 여러 관절의 반역은 물론 날이 갈수록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을 뿐인 뇌,
너의 한심한 나태도 용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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