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소설을 즐겨 있다보니 독서 편식을 좀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인문학 책에도 관심을 둔다.
김상욱님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인간」 과 더불어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려 두었던 책이다.
아무래도 인문학 책은 개인적으로 소장까지 하고 싶지는 않을 듯 하여~
굉장히 긴 시간 기다려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본인은 운명적 문과라 이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나마 공부하여 알게 된 것들을 적어보겠다면서 겸손하게 표현을 했는데......
결국 이 책도 문과의 언어로 풀어서 썼을 뿐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결코 만만히 보고 읽을 책은 아니라는 거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인간」이 이과인 사람이 이과의 내용을 문과적 언어로 풀어 쓴 책이라면,
이 책은 문과인 사람이 이과의 내용을 문과적 언어로 풀어 쓴 책이다.
그 말이 그 말 인 것 같지만.....독자인 나에게 두 책은 다르게 다가왔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과를 선택했고,
대학 때 경상대 수업을 들으면서 문과생들의 말장난을 들으면서 허탈했던 나는
결국 이과적인 성향이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다 ^^
과학이나 수학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들을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주려고 애쓰신 것 같은데,
그래서 그나마 알아들을만 한 내용들도 많았지만 주제 자체가 어려운 챕터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뒤로 갈수록.....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꽤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유시민 작가 특유의 어조가 글에서도 느껴져 꼭 음성지원이 되는 듯 여기지기도 했다~ 후훗~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도 있었다. 수알못이라면서....결국 서울대 갔잖아.
수학이 너무 어려웠지만, 양치기로 승부해서 결국 수학을 못하지는 않았대. 헐~~ 미워~~~)
중간 중간 공감가는 이야기들이 많아 좀 적어보겠다.
1
보통 사람이 이름을 아는 경제학자는 대부분 수학자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나름 공부를 잘한다는 경제학과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뜯는 문제를 부전공으로 경제학 강의를 듣는 수학과 학생들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광경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수학은 범용 학문이다. 수학을 잘하면 문과에서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
수학을 못해서 문과가 된 사람을 '운명적 문과'라고 하자. .....중략...... 선생님이 시험 점수가 신통치 않다고 아이들을 때린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종아리에서 느끼는 통증의 강도와 수학 개념의 이해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2
'출산 파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출산율이 떨어졌고 대입 수능시험 지원자수는 급감했다. 서울에서 먼 지역의 대학부터 대규모 정원 미달 사태를 맞는 현상에 언론은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 제목을 붙였다. 벚꽃이 먼저 피는 곳부터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중략...... 지방의 대학이 멸종 상황에 들어가고 수도권 대학이 입학 정원을 줄인다면 어떤 학과가 과녁이 될까?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 분야 학과들이다. 놀랄 건 없다. 뻔히 예측했던 일이니까.
'인문학 위기론'은 인문학 교수와 연구자들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 대학사외에서 나왔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누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문학은 그런 일을 잘하지 못한다. 원래 그런 학문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3
어느 하나 쉬운 질문이 아니었지만 인문학자들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했다. 그게 과학자와 다른 점이다. 과학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말하고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한다. 인문학자가 잘못한 건 없다. 인문학은 그런 학문이다.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에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럴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럴법한 견해끼리 충돌하면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어느 쪽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에는 과학과 달리 영원한 진리가 없다. 한때 진리로 통하는 이론도 100년을 견디지 못한다.
4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철학자는 모른다는 말도 무언가 아는 것처럼 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무엇보다 그런 면이 다르다. 나는 그게 인문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증명한 사실만 책에 담아야 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5
사람은 정말이지 서로 다르다. 같은 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다. 한겨울에 길고양이한테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길고양이를 붙잡아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면서 아이한테 저분들 덕에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준다. 돈이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부자도 아니면서 돈 자랑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따진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도 있다.
진지하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독서모임의 게시판과 부동산카페 게시판을 비교해 보라.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개체를 같은 종으로 간주하는 생물학의 분류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두 커뮤니티의 회원게시판을 주름잡는 두 닉네임이 한 사람의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사람의 자아는 각자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자아 안에도 서로 다른 여러 면이 있다. 모든 자아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우며 주체적이고 괴팍하다.
6
나는 어릴 때부터 종교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가졌고 독서와 대화와 경험으로 답을 생각해냈다. 대략 이런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다. 누구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증명할 책임은 신을 빋는 사람에게 있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고 종교인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도덕을 제공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종교가 없다고 해서 도덕을 세울 수 없는 건 아니다. 서로 교류하지 않았던 동서고금의 모든 문명에 비슷한 도덕규범이 있다. 종교가 없었어도 인간은 도덕규범을 세웠을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문과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고 대답한다.
7
탄소는 잘못이 없다. 지구에서 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전 그대로다. 호모 사피엔스가 탄소를 악당 취급하는 것은 살인범이 칼을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8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빋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남은 시간은 더 길다. 태양이 부풀어 올라 지구를 삼킬 때까지 50억 년이 있다. 우리의 후손이 혹시라도 그때까지 살아남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태양과 지구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빅 칠이나 빅 크런치를 견디지는 못한다. 죽어 없어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니 위로가 된다. 물론 이 모두는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인식 주체인 내가 죽고 없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든 말든, 우주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9
과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느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짚어 보았다.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어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뒤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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