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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공지영『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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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랑이 손주 사랑이라지. 

아마도 그 사랑이 가장 진실한 이유는

대상에게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서일 거야."



2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너무 늙고 그리고 너무 많은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그녀는 어깨를 짓누르는 옷 따위 벗어던질 수 있는 마이애미의 젊음을 질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랑은커녕 격졀한 미움조차 가지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자신의 인생은

그 겨울에 끝났다고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었다.



3


온 세상에 덮인 땅의 모든 혈관에 새싹! 새싹! 맥박이 뛰었고

그래서 늙은 자신에게는 저 시들이, 이 아침이 끔찍했구나.

희미한 봄밤의 향기가 묻어와서.

......늙어가는 이에게 깨어나는 봄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게다가 생의 봄날 그녀를 온통 차지했던 한 사람이 뉴욕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니.



4


40년 만에 만나 빠른 속도로 공룡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이 사람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40년 만에 맨해튼의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나 바로사우르스니 티라노사오루스니 하는 말을 나누는 것은 대체 어떤 낯설음일까.

...

.....

대체 이 사람은 오늘 하루 만나면 다시 헤어질 자신에게 왜 이렇게 많은 걸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지.



5


"....

...........

나도 덧붙이고 싶어요, 제가 그걸 꼭 사랑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라고.

소위 문학을 전공하고 일단 시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밋밋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도 되는 건가요?

최소 헤밍웨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첫사랑 하나는 완전체로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가

비가 오거나 낙엽이 지거나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 떠올라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6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는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7


그녀는 문득 자신이 살이 찌고 있을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을 교정하려고 했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이 만남 속에서 그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언젠가, 마주칠 누군가를 의식하고 보낸 시간이 40년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8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인연」 피천득



9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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