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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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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이 사람이 오늘 밤 집에 돌아가 나와 아이를 떠올린다면, 그는 분명 우리의 얼굴을, 어쩌면 차림새까지도 기억해 낼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내가 대형 할인매장에서 고기를 살 때, 그 고기를 썰어주고 봉투에 넣어주고 내게 건네주며 감사하다 말한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준 고기와 거기에 붙어 있는 가격표만을 살핀다.

한 사람이 내 앞에 있었으되 그 사람은 내 앞에 없었던 것이다.

 

 

2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흐르면 여행의 패턴이 정해질 거야.

너무 조급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힘들 땐 한 가지만 생각해.

지금 놓인 상황이 사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바랐던 순간인지....."

 

 

3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내가 그림을 볼 때 개미를 보고, 해협의 별장을 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본다.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선택'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여행 초반부에 알게 되어 기뻤다.

그것은 곧 '엄마, 나는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마치 선물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4

 

나이는 서른여덟. 할머니가 아니었다. 손자가 있다 해도 믿겨질 만큼 주름이 많은 얼굴인데 그렇게 젊다니,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뒤이어 부끄러워졌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 험한 노동과 고통에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거나 나무껍질 같은 손을 지니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끔씩 거울 속에서 찾아내는 나이 듦의 징후들은 이들의 '진짜' 주름에 비하면, 한없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5

 

철저하게 식용이 없는 아이를 2년 반 가까이 억지로 밥을 먹이면서,

식욕이 없다는 것도 일종의 장애와 마찬가지여서 주위 사람의 끝없는 인내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다 음식에 호감을 지닌 것은 아니며, 어떤 인간은 며칠씩 굶어도 여전히 음식이 이물스러울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차라리 두려운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아이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 나의 잘못인양 여겨지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문제들은 자꾸 쳐다보고 해결하려 애쓰는 것과 상관없이 아주 느리게, 눈에 띌 듯 말 듯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그 문제에의 처방은 기다림과 되풀이 외에 달리 없다는 것도 터득했다.

이 모든 과정은 아이에게도 내게도 시간과 성숙을 필요로 했다.

 

 

6

 

과연 내가 용감한가? 그건 아닐 것이다.

가끔 세상물정 모르고 겁 없이 덤빌 때는 있지만, 그건 용기와는 또 다른 것이다.

아이와 어차피 하루 24시간을 같이하고, 시장에도 같이 가고, 공원에도 같이 간다면 터키에 같이 못 갈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Why?' 에 대해 생각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한 것은 'Why not?' 이었다.

 

 

7

 

우리는 불결을 객관적인 지수로 측정하려 든다.

그래서 불결한 것은 언제나 논의의 여지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결함이란 가난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삶의 무대를 조금만 옮겨 보면,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크게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즉, '어느 정도의 빈곤과 불결함 VS 부와 청결함에서 마음의 편한함을 느끼는가'의 여부는

한 개인이 다양한 사람의 스펙트럼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8

 

생각해 보니 나도 한때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는 오직 아이의 안위와 관련된 것만이 나를 겁먹게 한다.

아이를 다치게 할 만한 것, 아이에게 해가 될 만한 것, 그런 것들만이.

 

 

9

 

로라는 모르고 있었다. 관계의 많은 부분이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부턴가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오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10

 

어떤 꿈은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이 현실을 배반하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얽어매고 있는 지독한 현실 - 생계나 가족 같은 - 에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 꿈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는 것만이 더 나은 것일 것이다.

 

 

11

 

'여행을 한다'라는 것의 정의를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본다면, 그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는 것이 '다른 것에 대한 체험' 이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익숙한 것을 고집하거나 자신과 다른 것을 무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익숙한 것이 좋으면 떠나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찮아 보이는 음식 한 가지에도 반드시 역사적 문화적 기원이 있는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의 그 많은 곳 중에, 터키의 그 많은 지방 도시 가운데, 일정에도 없는 아피욘까지 와서 이 냄새나는 음식을 마주하게 된, 소중한 확률에 의거한 예정된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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