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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황연숙『스튜어디스 레나의 하늘스케치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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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가 들수록 잡념이 많아진다더니
어른들 말씀은 하라도 틀리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잡념이 늘어간다.
바쁘지 않으면 세상의 한 조각을 읽을까봐 조바심이 생길 때도 있다.
사는 날에 대해 끊임없이 계획하고 주어진 일들을 하는 사이에
가족들, 특히 아이들을 외롭게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반면 그 일들을 놓은 후에 후회하고 인생이 덜 재미있어지고,
그 원인을 아이들에게로 돌리게 될까봐 또 걱정이 된다.

한 심리학 연구 발표를 보니
인간은 주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일 등으로 걱정을 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만 봐도 맞는 말이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
근심하는 경우는 단 2%란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98%의 걱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니 나는
근심과 염려에 인생의 시간 중 단 2%만 빼앗겨야 한다.
그 2%도 정면으로 맞설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2

우리 모두에겐 시작이 있다.
막연한 미래에서 오는 긴장이나 설렘은 접어두고라도
당장 해결해야 할 눈앞의 구체적인 일에 대해
과연 마땅한 변명이 있을까.
내 시작은 어땠는지 되돌아 본다.
내 시작도 부끄러운 실수가 많았고 그 실수들에 대한 변명도 무색했다.

누군가 내 처음을 참아 준 사람이 있었을 텐데.
누구인지 기억은 없지만,
기억에 없다는건 아마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툴고 느린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그 자신의 처음을 뒤돌아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암담해하는 나를 잘 참아준 사람 때문에
오늘의 내 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내게 큰 위로가 되던
엘렌 코트의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란 시는 아직도 따뜻한 감동을 준다.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모든 것을 한 입씩 뜯어 먹어 보라.
.......
죽는 법을 배워 두라.
빗속을 나체로 달려 보라.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


3

이제 성형은 부와 용기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외모 지상주의네 성형 중독이네 하는 말들로
그들의 소망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자인며가 좋지만 외모적 열등감에 인본주의가 흔들릴 정도라면
당당히 수술대 위에 누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질과 육체적 고통을 인내할 용기가 있고
그 용기로 그만큼 행복해진다면 난 찬성이다.


4

주니어들. 아직도 그들을 꿈꾸고 기대하며
소위 스타에 대한 환상을 지닌 동료 후배들을 대신해
장동건, 정우성, 이병헌 씨 등으로부터 사인을 받을 때에도
주윤발과 대화를 나눌 때의 그 설렘과 같지 않았다.
이런 게 늙는다는 걸까?
일본의 중년들은 겨울 연가의 배용준에 대한 가슴앓이로
이혼까지 한다던데,
설렘이 시들고 우스운 나이가 벌써 오는 건 아닐는지.


5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는 말은
40대 이후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행을 하다보면 탑승하는 순간부터
세상의 온갖 불행을 안고 기내로 들어오는 승객들을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 인상이 비슷하다.
자주 웃는 사람이 쓰는 근육, 늘 인상을 쓰는 사람이 쓰는 근육은 서로 다르고
또 항상 그쪽의 근육을 쓰다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얼굴에 자리잡게 되어 대개가 같은 인상이라는 말을
심리학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난 행복한 얼굴일까? 불행한 얼굴일까?


6

누구나 그렇겠지만 난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약속이 꺼려진다.
5분쯤이야 기다려주겠지, 하는 습관적인 생각으로
약속에 늦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과는
오랫동안 교제하기가 힘들어 진다.
남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코리안 타임이란 타이들을 남기지 않았는가.

시간 약속을 소홀이 여기는 사람이라면
사회생활은 물론 원만한 인간관계도 얻을 수 없다.
단순히 시간관념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기본적인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에 대한 배려로 상충 작용을 하며 관계를 쌓아가기 마련이다.
시간 운영, 특별히 다른 사람과의 시간 운영에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은
기필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바쁜 것이 자랑이 되어버린 우리들.
바쁘지 않으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격지심에 빠진 우리들.
그러나 제대로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것이라면
지나친 욕심이거나 혹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처리가
미숙해서 오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왕좌왕 시간을 보며 가지 말고 사람을 보고 가자.


7

포도원을 지나던 배고픈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고
여러가지로 애써보다가
결국 따먹지 못하자 저건 분명 신포도일 거야, 라며 돌아선다는 오랜 얘기.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들을 시기하고
쉽게 포기한다는 인간의 간교함을 빗댄 우화로 알고들 있으나
여우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르다.
긍정적인 성격과 더불어 실패한 상황에도 자신을 위로하고
금세 마음을 다지는 현명한 여우라고 생각한다.
그런 여우는 크게 상처를 받지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도 않는
편안하고 쉬운 성격이 된다. 나처럼.
어차피 흘러갈 시간 뒤로 남겨질 내 모습을 가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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