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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에쿠니 가오리『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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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2

나와 남편은 취향이 전혀 다르다.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좋아하는 여화와 좋아하는 책도 다르고,
뭘 하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다르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왔고,
오히려 다른 편이 건전하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같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3

남편은 외간 여자를 좋아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늘 인상이 좋으니까.
외간 여자니까.
화를 내면서 울지도 않고
남편의 결점을 지적하지도 않으니까.


4

외간 남자는 아주 친절하다.
예의바르고, 얘기도 많으 해준다.
나와 내 일을 칭찬해 주고,
잔이 비기 전에 재빨리 한 잔 더 주문해 준다.
물론 나는 외간 남자의 그런 배려가 반갑지는 않지만,
남편이 그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남자도 자기 아내에게는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 않겠지, 하고 생각한다.


5

"나 9월에 여행할 거야."

양복과 넥타이, 와이셔츠와 양말을 여기저기 벗어던지던 남편이,
옷을 벗다말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밥은?"

이번에는 그 말을 들은 내가 어안이 벙벙했다.

밥?

몇초동안, 둘다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간신히 내가 말했다.

"밥? 첫 마디가 그거야?"

지금 외출을 하는 거라면 몰라도 앞으로 몇 달 후에 여행을 간다는데,
그 말을 듣고 처음 하는 소리가 어디?가 아니고,
며칠 동안이나?도 아니고,
밥은? 이라니.

나는 나의 가장 큰 존재 가치가 밥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슬펐다.
...
.....
...
남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예의 진부한 의문
----이 사람, 혹시 밥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아니야---
을 떨어내기가 어렵다.



6

남편하고도 그렇다.
남편은 어질러 놓기만 하고
치울 줄을 모르는 데다
만사에 무심하고
감정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하는 경향이 있고,
나는 참을성이 없고
감정적이고
양보를 모른다(고 남편이 그런다).
그래서 우리 부부 사이에는 싸움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들러붙어 있기에 이렇듯 마음이 슬픈 것이다.


7

일요일 오후,
잠만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려고
흔들고 잡아당기고 하다가
나도 그만 옆에 누워 잠이 든다.
저녁 늦게,
사방이 캄캄해지고 나서야
실컷 잠잔 어린애처럼
허탈하기도 하고
충족되기도 한 기묘한 기분으로
같이 깨어난다.
왠지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하다.
둘 다 배가 고파 저녁을 먹으러 외출한다.
색깔이 있는 생활이란 예를 들면 그런것.


8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 사람은 왜 서랍을 열어놓고 닫지 않는 것일까.-------
내 멋대로 닫으면 실례가 될ㄲ, 하고 생각한 것은
백만 년이나 먼 옛날 일이다.

이 사람은 겨우 손만 씻으면서 온 화장실은
물바다로 만드는 것일까.
게다가 왜 젖은 손을 타월에 닦지 않는 것일까.

이 사람은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사람은 왜 자기 옷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사람은 대체 왜.........

나 자신도 아직은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이 사람'을 일반적인 '남자'로 대치해도 무방한 모양이다.
결혼한 여자 친구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너, 아직도 그걸 몰랐어?


9

남편과 함께 하고 싶은데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은데,
더 이상 이런 마음이 불거지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할 때도 있다.
함께 있고 싶다기보다
함께 있지 않으면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을 듯한 느낌.
함께 있으면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연인들처럼
들러붙어 있지 않으면 내 마음을 잃어버릴 것 같다.
함께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지 안헥 해줘, 하고 생각한다.
절실하게.


10

예를 들어 함께 살기 전에는,
남편이 만나러 와주면 무척 기뻤다.
만나러 온다는 것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함께 살기 시작하니
남편이 매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아도 돌아온다.
그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리석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도무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그렇게 물으면
응, 하고 고개는 끄덕이는데,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것 같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그런 질문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만사가 그 모양이라 그 한 해는 정말 진이 빠졌다.


11

나는 남편과 있을 때는 무거운 것을 절대로 들지 않는다.
무거운 것은 남편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밤길은 같이 걸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벌레가 들어오면 잡아줘야 하고,
때로 사치스런 초콜릿을 사다주면 좋겠고,
무서운 꿈을 꾸면 안심시켜 주기를 바란다.

올바르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래주었으면 한다.


12

" 나 말고 다른 여자하고도 잘 지내."
하고 말하곤 했다.
잘 지낸다는 것은 물론
연애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를 마주하고 만나고, 그 사람을 제대로 보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 결과로부터 도망치지 말라.'
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바보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다른 여자를 보면 절대 안돼.

3년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배웠다.
억지가 통하면 정당한 일은 안 통한다든가.

남자든 여자는 사랑이란 몸을 보호해야 이루어지는 것.


13

결혼하고야 내가 지겹도록 사리정연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혼이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거의 심신의 파멸.

다만 결혼하고야 나는 분노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한층 혼란스럽다.

그러나 결국 결혼이란 그럼에도 혼자이길 선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있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있는것.


14

결혼이 연애와 다른 것은 생활의 장을 공유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결혼은 첨예한 문화 충돌일 수밖에 없다.

이삼 십 년을 다른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그 생활 패턴에 익어 있는 남녀가
어느 날 갑자기 만나 불꽃 튀는 연애를 했다 한들,
결혼에 돌입하는 순간 생활이란 걸림돌은
그들을 그냥 사랑이나 나누라고 뒷짐지고 있지 않는다.

신혼 시절이 깨소금 맛 같지만 않은 까닭이다.

연애 시절에는 그토록 멋지고 듬직해 보였던 남자가
집에 돌아오면 드러누워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리는 남자로 돌변했다 한들,
그토록 자상하고 매너가 좋았던 남자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게으름뱅이로 돌변했다 한들,
그토록 제 몸은 둘째치고 여자를 아꼈던 남자가
감기만 걸려도 벌벌 떠는 남자로 돌변했다 한들,
그것은 돌변이 아니다.
다만 연애 시절에 그 남자의 전부를,
그 남자를 키워온 문화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남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연애 시절에는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사랑스러웠던 여자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에 바가지만 긁는 여자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여자가 지금까지 몸담고 있었던 문화를
알지 못했기에 달라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활이란 이렇게 사랑만을 원했던 두 사람의 전부를 발가벗겨 놓는다.

하지만 한편 결혼이란 믿음이며 안심이다.

보이고 싶지 않지만 보여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허용되고,
굳건히 지켜왔던 껍질이 발가벗겨져도 부끄럽지 않고,
때로는 안심하고 자기를 해방시킬 수도 있는 생활의 장.
그래서 옥신각신 충돌 속에서도 조화와 새로운 문화가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이란 서로의 인생을 건 약속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노라, 가 아니라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삭이겠노라는,
그래서 밀고 당기고 부딪치는 충돌이 있어도
함부로 배체하고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자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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