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안 건 한참 전이지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읽었다.
간혹 베스트셀러라고는 하나 소장가치는 별로 없는 책들이 요즘 많이 보여서이기 때문이었던 듯 싶다.
문재인 대통령님의 추천도서라 하여 다시 한번 찜해두었다가,
실은 다른 책을 사면서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걍 곁들여 샀다.
그만큼 큰 신뢰는 없었나보다.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며 하루 만에 후르륵 읽어버렸다는 후기를 많이 봤는데,
왜들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책이 작고 얇에 하루 독파를 도전해볼만하기도 했고, 그에 앞서 중간에 내려놓고 싶지 않을 만큼
흥미 진진했다.
빨치산이라는 단어야 말로 참으로 오래되고 식상한 단어인데,
그 단어를 이렇듯 조심성없이 수시로 내뱉는 소설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늘 진지하고 심각하게 여겨졌던 그 단어를 블랙코미디로 덮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이렇게 위트있게 소설로 적어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안타깝다.
모든걸 통달해 내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시간들을 겪었을까.....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이박삼일의 짧은 일정안에 녹아든 여러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머니의 첫서방 얘기할 때가 젤로 웃겼음 ㅋㅋㅋㅋ
일부러 아껴가며 천천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하루만에 독파해버렸다.
그리고.....표지도 맘에 든다 ^^
(표지가 맘에 들어 책을 샀다는 X의 말이 웃겼다며 얘기하는 봄이에게 내가 해 준 말 ㅋㅋ
나돈데? 책 고를때 많은 영향을 끼치는게 표지인데? ㅋㅋㅋ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봄이 ^^
이 책의 표지 참 예쁘다!!)
1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2
오후 들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조문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 손님들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주로 아버지의 지인이었다.
사촌들이 번갈아 상주 자리를 지켜주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누군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늘어놓고 잠시 애도에 잠길 만하면 새로운 누군가를 맞아야 했다.
눈물조차 고일 새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분주한 사흘이 될 듯했다.
3
그날, 나는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몸에는 러닝셔츠 자국이 선명했다.
알몸인데도 러닝셔츠를 입은 것 같았다.
러닝셔츠 입었던 상체 부위와 바지에 가려 있던 하체는 하얗고, 가려지지 않은 부위는 새까맸다.
그게 우스워 깔깔거리던 내 눈에 낯선 무엇인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나에겐 없는 것이 달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싶어 나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게처럼 옆걸음으로 속도를 높여 후다닥 옷을 입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인생 최초의 깊은 슬픔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결여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4
지각인 줄 알고 엉엉 울며 뛰어 들어간 교실에는 가을 오후의 햇살만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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