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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은희경『소년을 위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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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가끔 듣는 아빠 이야기 중에도 비슷한 게 있다.
성실한 술꾼이라서 얼굴 보기 힘들었지만 아빠는 어쩌다 집에 있을 때에도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다.
구석방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지뢰찾기게임에 열중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마루에서 혼자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브라운관과 대꾸놀이를 시작하고.
등장인물이 '밥 먹었어?'라고 말하면 '입맛 없어' 라고 쌀쌀맞게 대답하고
'나가서 바람 쐬자'에 '싫어, 귀찮아'라고 튕겨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그게 혼잣말놀이가 되기도 했다.
삼식 분에 한번 정도, 나, 결혼했나? 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몇 번 되풀이하다보면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문이 닫힌 구석방을 향해 던지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있잖아! 나, 결혼했어?




2
- 염세주의는 정말로 유익한 거야.

말이 길어질 조짐인데, 괜히 물어봤나.

-나쁜 예상은 미리미리 다 해놓아야 해. 기대를 품으면 보통 정도인데도 나쁘게 됐다고 실망하게 되거든.
하지만 최악을 예상해두면 언제나 그보다는 나은 일이 닥치게 되어 있다, 이거야.




3
신민아씨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겁내게 돼.
나에 대한 무슨 권력 같은게 그 사람한테 생기는 거야.
말이 되니?
근데 그런 게 있긴 있거든.




4
-낸시 스미스라는 여자가 쓴 시에 이런 대목이 있어.

재욱 형이 시를 읆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강한데도 약한 척해야 하는 게 지겨운 여자가 한 명 있는 곳마다,
상처받기 쉽지만 강하게 보여야만 하는 게 피곤한 남자가 하나 있다.
항상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기대에 부담을 느끼는 소년 한 명이 있는 곳에,
자신의 지성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쳐버린 소녀가 하나 있다. 그리고.....

시는 술 한 모금을 마신 뒤에 다시 이어졌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게 지겨운 소녀 한 명마다,
자신의 연약하고 흐느끼는 듯한 감성을 숨겨야 하는 소년이 한 명 있다.

이건 나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의 해방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소녀 한 명이 있는 곳마다,
자유를 조금 더 쉽게 찾아나가는 소년이 생겨난다.
경쟁을 할때마다 여성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받는 여자가 한 명 있는 곳마다,
경쟁을 통해서만 남자다움을 증명해야 하는 남자 하나가 있다.....

이 대목에서 재욱 형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거, 70년대 미국 여성운동 단체에 퍼졌던 시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지금도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거지.
서로 맞물려 있더.
힘을 모아 경직된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 세상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가진 자들이 움직이는 것이라서 말야.

그때 내가 대꾸했었다.
소년도 소녀도 아닌 것이라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라면, 그럼 그건 나겠네, 라고.
지금 생각하니 더욱 확실하다.
어떤 좌표인지 그것은 다음 문제다.
좌표 위에 나라는 점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거다.




5
-어떤 좋아하는 마음이라도 변하게 돼 있어.
그걸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불편한 일이야.
변해버린 나 자신도 께름칙하고.
그러니 나한테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존재가 달가울 리 없는거지.
연우 아빠도 그랬을까.
그렇게 원했던 결혼이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변해?
나,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해.
너무나 원했던 결혼이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그 상투적 상황을 받아들이기 오히려 힘들었을지도 몰라.
도토리들을 대하는 내 마음처럼.
잘해주긴 해야겠는데 그게 묘한 압박이 되어 부다므럽고 결국 짜증이 나고.....
그 사람한테는 내가 도토리들 같은 존재였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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