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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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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친구 Z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 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2

 

어머니는 테레자에게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며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다. 아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테레자는 삶의 최고 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빋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3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4

 

다름 아닌 우리의 예절 바른 교양 때문에 경찰의 끄나풀이 된다는 것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아빠와 엄마가 우리에게 주입한 "진실을 말해!" 라는 명령은 심지어 우리가 경찰에게 취조당할 때조차도 거짓말하는 데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경찰과 싸우거나 욕을 하는 것이 (그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언정)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라도) 하는 것보다 우리에겐 훨씬 쉬웠다.

 

 

5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 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6

 

하긴 그녀는 수일 전부터 미리 카레닌의 죽음을 상상한 사람처럼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생각해 둔 터였다. (아!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을 미리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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