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째, 상세한 계 자료는 학술회의에나 어울리지 병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권위 있는 통계인 카플란 마이어 생존분석 곡선은 시간 경과에 따른 생존 환자의 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분석을 척도로 삼아 병의 진행을 판단하고 병의 경중을 이해한다. 아교모세포종의 경우 생존 곡선이 급격히 떨어져 환자가 2년 후까지 생존하는 경우는 약 5퍼센트에 불과하다.
둘째,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평균 생존 기간은 11개월입니다', '2년 안에 사망 할 가능성이 95퍼센트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대다수 환자가 수개월부터 2~3년까지 생존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다. 문제는 환자가 곡선의 어디에 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환자는 6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아니면 60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는 의사들이 있는데("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6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그런 수치를 가르쳐 주는 건지 나는 너무나 의아했다.
2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3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4
나는 아기가 생기면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내가 죽은 뒤 루시에게 남편도 아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은 루시가 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녀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할 텐데, 내 병이 악화되면 나까지 돌보느라 더 힘들 것이었다.
"아기가 생기면 우리가 제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루시가 물었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내가 말했다. 루시와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
5
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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