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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밑줄긋기

얀 마텔『포르투갈의 높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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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픔이 밀려와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운전대가 마침내, 완전히 그를 패배시켰다.

토마스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속이 지긋지긋하게 메스꺼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영혼이 고통스럽고 기계를 운전하는 데 진절머리 나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의 시련이 절반만 끝나서다. 이제 리스본까지 그 먼 길을 운전해야 할 테니까.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씻지 않고 면도를 하지 않아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며칠 낮을 계속 낯선 땅에서, 며칠 밤을 계속 춥고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직장을 잃어서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먹고 사나?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제 발견한 게 달갑지 않은 십자고상을 발견해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들과 연인이 그리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가 아이를 죽여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유는, 이유는.

그는 숨을 멈추고 딸꾹질을 하면서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은 채 아이처럼 흐느낀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 - 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2


이제 우리의 생활에서 아무것도 맞아떨어지지 않았어요.

서랍은 더 이상 꽉 닫히지 않았고, 의자와 탁자는 흔들거렸고, 접시는 이가 나가고, 숟가락에는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었죠.

옷은 얼룩지고 찢어지기 시작했고 - 바깥세상 역시 딱딱 들어맞지 않았어요.

아들의 죽음은 외부 세계에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다 그렇지 않나요? 대물림하는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분할해야 되는 것도 아니죠.

완수하지 않은 일이나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청산해야 되는 빚도 없어요.

아이는 부모의 그늘에서 빛나는 작은 태양이고, 그 태양이 사라지면 부모에게는 어둠만 있을 뿐이죠.

어미 노릇을 해줄 자식이 없는 마당에 어미인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것은 머리가 떨어진 꽃이 되는 것과 비슷해요.

우리 아들이 세상을 떠난 날 나는 대머리 줄기가 되어버렸어요.

아주 오랫동안 라파엘을 원망하게 된 이유가 하나 있어요.

그이가 하루 지나서야 집에 왔다는 거예요. 라파엘은 허둥댔지요.

하지만 어미는 자식이 죽으면 즉시 알 권리가 있어요.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지 않은데도 단 1분이라도 그런 줄 아는 것은 어미 노릇에 반하는 죄예요.



3


아이들 말고는 아무도 나무에 침팬지가 있는 줄 모른다.

어른들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자동차와 가족의 배를 채우느라 바쁜 반면,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본다.

아이들이 씩 웃는다.

몇몇은 부모에게 손짓하면서 알리려고 한다.

하지만 부모는 아무 데나 쳐다보거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이들은 차를 타고 떠나면서 오도에게 손을 흔든다.



4


낮에 차를 몰고 미국을 횡단하면서 피터는 자기도 모르게 규칙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 좌석의 승객을 흘끔댄다.

차에 침팬지가 있다는 사실에 번번이 가슴이 철렁하다.

오도 역시 창밖의 경치를 보다가 똑같이 규칙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고는,

인간과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을 피터는 눈치챈다.

내내도록 서로에 대한 경이와 놀라움 (또 약간의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뉴욕으로 향한다.



5


그러고 나니 할일이 없다.

3주 동안 - 아니 한평생일까? - 쉼없이 움직였는데, 이제 할 일이 없다.

무수한 종속절과 수십 개의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가고, 기발한 접속사들이 문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와중에

- 예기치 못한 막간의 촌극까지 끼어들고 -

하이픈 없는 명사들이 난무하는 장문이 마침내, 놀랍도록 고요한 마침표와 함께 끝이 난다.

한 시간쯤, 꼭대기 층 계단참에 나가 앉아서,

지치고 조금 긴장이 풀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 마침표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문장은 무엇을 가져오려나?



6


오도가 왜 같이 있으려 하는지, 왜 특별히 그를 원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미스터리다.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웃게 만들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진지하게 봐주기 때문이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야.

.....

........

내가 왜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지 나도 몰라.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뭐 뭐 뭐 뭐 때문이야.



7


오도가 죽 끓이기 같은 간단한 인간의 기술을 터득한 반면, 피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려운 동물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피터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오도는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처음에 그는 한눈을 팔고 싶었다.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머릿속으로 같은 영화를 돌려보고, 후회하고 조바심치며 잃어버린 행복을 갈망하곤 했다.

하지만 강변에 앉아 빛나는 휴식의 상태에 젖는 데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오도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그가 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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